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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7일 차

두브로브니크에서 스플리트로



두브로브니크에서 먹는 마지막 아침은 아주 푸짐했다. 남은 재료를 거의 몽땅 털어서 만들었다. 사진을 찍을 때쯤에는 이미 포만감으로 가득했지만 버리기가 아까워서 기어코 다 먹고 말았다.


짐을 챙겨서 나가니 호스트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스트의 차는 버스 노선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왜 이 방향으로 가시나 싶었는데, 관광객이 잘 모를 만한 동네 샛길을 탔다. 호스트 분은 조만간 한국과 크로아티아 간에 직항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관광객이 그만큼 많아서 그렇게 될 거라고. 내가 제발, 제발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간절하게 외치자 호스트 분은 크게 웃었다. 버스 시간 30분 전에 출발해도 충분하다던 말은 사실이었다. 버스터미널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탈 버스는 제시간에 맞춰 왔다. 하지만 그 버스를 타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예매했더라도 사람이 꽉 차면 버스에 타지 못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너무 불안했다. 우리 차례가 되어서 짐을 맡기고 표를 검사하는데, 기사 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인터넷 예매표를 들고 오거나 어플을 보여줬는데 우리 표만 현장에서 발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못 태울 때가 있더라도 미리 예매한 사람들을 먼저 태우지 않으면 안 되거나, 그런 것 같았다. 짐을 싣던 분과 둘이서 크로아티아어로 한참을 얘기하셨다. 어제 미리 산 거예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어서 눈치만 살폈다. 입이 바짝 말라가던 순간이었다. 기사 분은 별일 아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버스에 타라고 손짓했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스플리트로 가는 버스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영토를 한번 지나간다. 국경에 이르자 버스에 함께 타고 있던 직원 분이 앞줄부터 여권을 차례로 걷어 갔다. 사람들이 내렸다 다시 타는 건 번거로우니까 여권만 가져가서 심사를 받는 것 같았다. 거의 맨 뒷줄에 있던 엄마와 나도 여권을 내기 위해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직원 분은 절반 정도만 여권을 가져가고는 그냥 내려버렸다. 우리를 포함해서 뒷쪽에 앉아 있던 관광객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잠시 후 직원이 여권을 들고 돌아오자 버스는 그냥 출발했다. 여권을 내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실소를 터뜨리며 이래도 되는 거냐고 쑥덕거렸다. 다음 국경을 통과할 때도 우리는 여권을 내지 않았다. 같은 버스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 국경을 오가는 데다 도중에 정차하지 않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긴 거였을까. 어차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들어가는 버스도 아니고 크로아티아 도시 간 왕복 버스니까 괜찮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국경인데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 걱정됐다. 아예 심사를 안 받는 거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이 구간은 길어서 도중에 잠시 정차한다. 물론 크로아티아 영토로 들어온 후에. 기사 분은 대략 2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을 공지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서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화장실은 그다지 위생적이지 않았고 사용료를 내야 했으며 화장실 칸은 두 칸 뿐이었다! 사용료를 내는 건 괜찮지만 비위생적이라니... 게다가 화장실 앞의 긴 줄을 보니 도저히 시간 내에 버스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동전을 쥐여 주고 혼자서 버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버스 출발 시간이 다 됐는데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또 다시 입 안이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기사 분이 자리에 앉는 동시에 엄마가 버스에 올라탔고 나는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미처 돌아오지 못한 분이 계셨었는지, 버스가 움직이자 몇몇 사람이 "Wait!"을 외쳤다. 엄마에게 나도 저렇게 외칠 뻔 했다고 투덜거렸더니 엄마는 그럼 화장실이 두 칸 뿐인데 어쩌냐고 대답하며 웃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스플리트에 도착했지만 도착하자마자 길을 잃어버렸다. 스플리트의 구시가는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길이 너무도 복잡했다. 구글맵의 GPS는 정확한 위치를 잡아내지 못 하고 뱅뱅 돌았다. 특단의 조치로 엄마에게 캐리어를 맡기고 기다리게 한 뒤, 나 혼자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우연히 어떤 카페의 친절한 직원 분이 번짓수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주셔서 지도를 볼 줄 알게 되었고, 우리는 간신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스트 분은 우리가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아서 길을 잃은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버스터미널로 되돌아갔다. 내일 탈 버스표를 예매하고, 엄마가 아까부터 먹어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샌드위치를 두 개 샀다. 샌드위치가 너무 커서 둘 다 절반도 못 먹었다. 남은 것은 버리지 않고 다시 잘 포장해서 내 가방에 넣었다.



북문 쪽 성벽

거소 유적그레고리우스 닌 대주교 동상의 발


스플리트를 돌아볼 시간은 한나절 뿐이었다. 숙소를 찾아다닐 때 지나쳤던 성 돔니우스 대성당을 가장 먼저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입구를 찾으며 서성이다가 표지판을 발견해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는 성 돔니우스 대성당과 지하궁전, 주피터 신전을 볼 수 있는 입장권을 골랐다. 날이 흐려서 종탑에 올라가 보는 건 포기했다.


대성당은 큰 감흥이 없었다. 역사적·종교적 지식이 짧다 보니 성당들의 차이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주피터 신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중간에 들른 지하궁전은 아주 흥미로웠다. 장식도 없고 공간만 남은 곳이었지만 오히려 엄마와 나는 그 장소를 더 신기해 하며 천장까지 구석구석 훑어봤다.


거소 유적도 재미있는 장소였다. 남은 주춧돌 위에 당시의 생활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보며 걸었다. 돌이켜보면 두브로브니크에서는 화려한 종교 건물보다 성벽 투어와 박물관이 좋았고, 슬로베니아에서도 류블랴나 성보다 포스토이나 동굴이 더 좋았다. 여행의 절반 이상이 지나고 나서야 엄마와 내가 여행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구시가 바깥에서 성벽을 따라 걸으며 북문까지 갔고, 그레고리우스 닌 대주교 동상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하도 소원을 빌면서 동상의 발가락을 만져서 정말 반들반들거렸다. 엄마도 동상의 발가락을 한번 만졌다.


"엄마 기독교잖아."

"그냥 해보는 거지."

"그런데 대주교 동상인데 왜 여기에 소원을 빌어? 모순 아니야?"

"그러게."



젤라또를 사먹고 엄마가 원하던 홍차까지 사고 나서야 카페에서 쉴 수 있었다. 엄마는 티 하우스에서 고전적인 차를 많이 살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곳은 다양하게 믹스한 차가 더 많은 곳이어서 당황했다. 차의 종류는 아주 많았지만 원하는 게 없었는지 그냥 홍차만 구매하고 나왔다. 나로드니 광장에는 카페가 모여 있었다. 우리는 한적한 곳을 골라 앉았고, 라떼를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크로아티아 카페들은 대체로 같은 브랜드의 찻잔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이 카페의 라떼 맛은 그럭저럭이었다.



구시가에서 살짝 벗어나 '루차츠'라는 작은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처음엔 모든 빈 테이블에 예약 표시가 놓여 있어서 당황했지만 곧 직원 분이 와서 원하는 테이블에 앉아도 좋다고 안내 받았다. 여행 책에 나온 구운 농어를 먹어 보고 싶었는데 메뉴판에 없어서 그냥 참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주문 받던 직원 분은 메인 하나와 샐러드 하나로 주문을 끝낸 나를 보고 나눠 드시냐고 물어봤다.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그럴 거라고 답했다. 엄마는 나보다 위가 작아서 포만감이 금방 들고, 나는 여행 중에는 소식하는 버릇이 있다. 음식을 남기느니 차라리 적게 주문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은 1인 2메뉴 정도는 먹는 것 같았다.


요리가 나오자 엄마의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보기에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생선 요리는 처음이라 기대가 컸다. 참치 스테이크의 맛은 기대에 부응하고도 남을 정도로 아주 맛났다. 고기 요리처럼 간이 세지도 않았고 아주 부드러웠다. 특히 플레이팅 된 바질 소스가 너무 맛있어서 레시피를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샐러드도 정말 맛있었다. 혹시 다음에도 스플리트에 오게 된다면 여기는 꼭 다시 오고 싶다고 말하자 엄마가 맞장구쳤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어느새 해가 다 져 있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과일을 몇 개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호스트 분이 준비해준 와인을 마시며 TV를 봤다. 오늘은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등등 엄마가 원하던 것을 전부 이룰 수 있었고 나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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