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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8일 차

스플리트에서 자다르로



늦은 봄이라고 해도 될 만큼 따뜻하고 맑은 날을 맞았다. 엄마는 잠을 잘 못 잔 것 같았다. "너는 잘만 자더라. 안 시끄러웠어?" 숙소 바로 밑의 클럽에서 새벽까지 이어진 음악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서 우리는 곧장 자다르로 향했다.


자다르에 도착하자마자 내일 떠날 버스표를 끊고 숙소로 갔다. 이곳 숙소의 호스트 분도 할머니셨다. 둘이서 쓰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넓은 아파트먼트를 안내받았다. 햇살이 내리는 테라스도 있었는데, 그곳 의자에 잠깐 앉았더니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커피를 타 왔고, 우리는 테라스에서 햇살을 맞으며 동네의 조용함을 즐겼다.



숙소를 나와서 구시가로 가던 중에 여행 책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에게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혼자서 숙소로 되돌아갔다. 책을 챙겨 들고 나름 서둘러 왔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웠고 걱정됐다. 멍하니 있다가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전화를 받은 엄마는 나에게 지금 가고 있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엄마는 나 없는 동안에 해변과 산책길을 신나게 돌아다니며 셀카를 찍었었다.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구시가에 도착하자마자 '펫 부나라'라는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수제비 같은 음식이 나와서 신기했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양이 많지 않았다. 엄마도 양이 부족했던지, 시로카 거리에서 피자 한 조각을 사서 먹었다.



우리는 성 도나트 성당과 성 스토시야 성당을 무심히 보고 난 후, 구시가의 샛길을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작은 카페와 상점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골목을 돌아다니던 중에 교회인지 성당인지 모를 아주 작은 건물을 발견했다. 건물 바깥에서 기웃거리다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우리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내부는 지금까지 본 어떤 곳보다도 소박했다. 내가 생각하는 종교적인 장소에 그나마 가까운 곳이라고 말하자 엄마도 그렇다고 대꾸했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들어오는 분들은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도를 하다가 나갔다. 우리는 그곳의 고요함을 느끼다가 나왔다.


도시 곳곳을 충분히 구경했으니 이제 바다의 오르간으로 가기로 했다. 로만 포룸을 지나가게 되어서 그곳도 살짝 구경했다. 역시나 다른 관광 장소들 보다 이쪽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비록 주춧돌 정도만 남아 있었지만 하나씩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실컷 본 후에 우리는 다시 걸었고 해변 쪽 산책로를 지나서 바다의 오르간에 도착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그곳에 앉거나 누워서 파이프 소리를 즐기는 중이었다. 우리도 한동안 그곳에 앉아서 그 소리를 들었다. 굉장히 좋은 공공예술이자 건축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왜 비슷한 멜로디만 반복되냐고 물어봤고, 나는 소리가 나는 원리를 엄마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파도가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일렁이니까 그런 거지. 날씨에 따라 달라지겠지."

"음, 그렇구나."



햇살이 아주 따뜻했고 바다는 반짝반짝 빛났다. 평화로웠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햇볕이 강해서 선글라스는 벗을 수 없었다. 엄마는 커피를 마시고 나는 무알코올 칵테일을 마셨다. 엄마 말에 의하면, 커피 맛은 그냥 그랬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다를 즐겼다. 


한참을 앉아 있던 우리는 태양의 인사가 빛나는 모습과 석양을 보기 위해 해질녘에 다시 오기로 했다. 계산을 하려는데 우리 테이블 담당 직원 분이 계속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직원 분을 불렀는데,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그 분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실내로 들어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가서 직접 말을 걸었다. 그 직원 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우리 테이블 담당이 아니라고 말했고, 나는 담당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 분은 계산 방법을 확인하고서는 직원을 찾아주겠다고 대답했다. 엄마에게로 돌아와서 앉아 있으니 그제야 담당 직원 분이 와서 결제할 수 있었다. 내가 느긋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 분이 하필 그때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엄마에게는 우리가 좀 더 느긋함을 즐길 줄 알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버스터미널 근처의 큰 마켓에서 장을 봤다. 그곳은 야채나 과일을 담는 방식이 독특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피망을 골랐다면 피망 이름표에 쓰여 있는 번호를 기억한 뒤, 가판대 옆에 마련된 기계에서 같은 번호를 찾아 눌러야 한다. 그렇게 해야 가격 바코드가 표시된 스티커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엔 그걸 몰랐던 우리는 봉지에 야채와 과일을 담으면서 '가격표도 따로 없는데 계산대에서는 이걸 다 어떻게 계산하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각 식재료 이름표에 적혀 있는 알 수 없는 번호를 내가 알아챘고, 엄마는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슬쩍 확인했다. 그제서야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고, 우리가 고른 재료들의 번호를 확인하느라 다시 돌아다녀야 했다.



오후가 되어 어둑어둑해졌다. 숙소에서 쉬던 우리는 다시 구시가를 찾았다. 구시가의 입구인 육지의 문이 아직 보이지 않았는데도 바다의 오르간이 연주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 주위에 사는 분들에게는 어쩌면 때때로 소음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고 엄마는 말했다. 구시가 내부의 해변 산책로에는 낮보다 사람이 많았고 간이 상점도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바다의 오르간에 앉아 석양을 보거나 혹은 빛나기 시작한 태양의 인사 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강해진 바닷바람 덕분에 바다의 오르간은 낮보다 훨씬 다양한 음을 연주했다.



우리도 태양의 인사에 앉거나 누워서 셀카를 찍었다.



해가 거의 다 넘어가고,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야식을 사기 위해 시로카 거리로 향했다. 조명으로 밝아진 구시가는 낮에 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가던 도중에 성 도나트 성당 건물에 조명을 비춰서 표지판을 대신하는 것을 발견했다. 건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밤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낮보다 더 많아서 시로카 거리가 북적댔다. 엄마의 지인 분이 추천해준 감자튀김도 사고, 길가다 발견한 빵집에서 빵도 사고, 우연히 발견한 케이크 가게(아마도 낮에 관심을 주지 않고 지나쳤던 가게들 중 하나)에서 엄마가 그렇게도 노래를 부르던 케이크도 샀다. 감자튀김과 함께 먹으려고 근처 TISAK에서 작은 콜라를 샀지만, 감자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야금야금 먹다 보니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먹어버렸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호스트 분이 살고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해야 했기 때문에 비용을 미리 지불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스트 분은 자신은 지금 퇴근한 상태라 영수증을 지금 줄 수는 없고, 사무실은 새벽 6시부터 여니까 체크아웃은 걱정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영수증은 체크아웃 할 때 주겠다고도 했다. 퇴근하신 줄은 몰랐었지만 저녁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 분은 미안해 하는 나에게 무언가 건네주셨는데, 말린 라벤더가 들어간 작은 장식품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라벤더 향기가 솔솔 났다. 


저녁을 간단히 만들어 먹은 뒤, 본격적으로 야식 타임을 가졌다. 포장해서 가져온 케이크는 이리저리 흔들려 약간 뭉개졌지만 맛있었다. 빵은 구운 게 아니라 튀긴 것처럼 겉이 단단했다. 물론 이것도 맛있었다. 


이 날은 아주 여유롭고 한가하게 즐기며 보낼 수 있었다. 다른 기대 없이 오로지 예술적이라는 그 석양 하나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석양만큼이나 도시 자체가 좋았다. 엄마도 여유로운 일정을 보낸 것과 한적한 이곳 동네를 마음에 들어했다. 내일 떠나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에서의 일정을 줄이고 이곳에 더 머무를 걸 그랬어, 라는 얘기를 나눌 정도로. 여행 8일 째, 이제는 계획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우리에게 맞게 완급 조절을 할 줄 아는 능력이 조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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