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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5 - [엄마랑 크로아티아] - 엄마랑 크로아티아 : 프롤로그



여행 1일 차 

한국에서 자그레브로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아시아를 벗어나는 건 처음인데다 엄마도 챙겨야 한다. 게다가 경유까지! 책임감이 막중했다.



폴란드 LOT 항공을 이용했고 바르샤바에서 경유해야 했다. 바르샤바 공항은 넓지 않고 경유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닥에 안내선이 색색깔로 표시되어 있다. 크로아티아로 가기 위해서는 Non Schengen 표시를 따라 가면 된다.


경유할 때도 짐 검사를 다시 받는다. 캐리어는 인천공항에서 크로아티아로 바로 보냈지만 둘 다 배낭이 있었다. 문제는 내 배낭. 전자기기가 있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엄마의 휴대용 혈압기가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어떤 전자기기를 갖고 있냐고 다시 물었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 잠깐. 휴대용 혈압기를 영어로 뭐라고 하지?


"Blood ... pressure ..."

"What?"

"Um ..."


입국 수속도 아니고 경유 과정에서부터 영어 실력이 문제가 될 줄이야. 그 분은 나에게 "Ipad?", "Laptop?" 등등 계속 물어보다가 내가 전부 "No."라고 답하자 그럼 그냥 가라고 하며 웃었다. 그 순간, 이번 여행이 아주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영어 실력으로 엄마를 잘 챙길 수 있을까.


바르샤바 공항은 게이트가 정말 자주 바뀌는 곳이었다. 게이트 변경 안내 방송이 정말 끊임없이 나왔다. 우리 게이트도 두 번 정도 바뀌었다. 방송을 다 알아들은 건 아니고, 게이트 안내판을 자주 확인했다. 공항이 작다 해도, 게이트 끝에서 끝으로 뛰는 건 정말 ... 엄마는 뭐 이리 게이트가 자주 바뀌냐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LOT 항공 뿐만 아니라 다른 항공사의 이코노미 클래스가 다 그렇듯, 장시간 비행에 이코노미 석은 너무 불편하다. 무엇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좌석 때문에 의자를 제끼기도 조심스럽다. 엄마와 나는 잠도 얼마 못 자고 영화만 주구장창 시청했다. 혼자 가는 여행이라면 모를까, 다음 번에도 엄마와 여행을 간다면 돈을 더 주고서라도 비즈니스를 타리라 결심했다.



비행기 위에서 처음 만난 크로아티아는 황혼으로 물든 대지였다. 하늘이 잘 보이는 드넓은 땅이 부러웠다.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막연한 동경이 생겼다.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TISAK에 가서 SIM CARD를 구매했다. 엄마도 나도 데이터와 통화가 전부 가능한 걸로 골랐다. 아파트먼트 호스트에게 문자나 전화로 연락을 해야 하기도 했고 혹시라도 엄마와 떨어지게 되면 연락할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게 해야지'라든가 '그냥 데이터로 카카오톡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준비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두기로 했다. 설령 엄마가 여기서 전화 한 번 안 쓴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 돈이었다.


첫날 묵은 숙소는 자그레브 Autotrans(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 레아'였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우리는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해서 그냥 어서 쉬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이때 찍은 사진은 없다. 그곳은 굉장히 깨끗하고 정돈된 집이었고 호스트도 친절했다. 호스트는 우리에게 자그레브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먹고 싶은 요리가 있냐고 물은 다음 그 요리를 잘하는 맛집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 좋았지만, 어쩌다 보니 엄마와 호스트 사이에서 잠깐 통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진땀났다. 다행히 예상했던 것보다 숙소가 괜찮았던지 엄마는 "생각보다 좋은데?" 라고 말했다.


첫 호스트를 만나고 나자 더더욱 실감났다. 아, 역시 내 영어 실력이 형편없구나. 크로아티아는 영어권 국가가 아니지만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잘했다. 이분들이 한국어도 잘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


버스터미널 쪽에 있는 작은 슈퍼에서 그날 먹을 생수와 간단한 저녁거리를 샀다. 슈퍼에는 여러가지 음료와 요거트, 치즈, 버터, 햄, 빵, 과일과 야채, 과자 및 일회용품 몇 가지가 있었다. 계산을 할 때 0.00 단위로 떨어지는데, 그 계산원 분은 소수점 밑의 금액을 받지 않으셨다. 동전을 들고 고심하는 내가 안쓰러웠던 건지 아니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랬던 건지.


그렇게 힘겨운 첫날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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