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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4일 차

류블랴나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새벽부터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예약해놓은 두브로브니크 행 비행기를 타려면 제시간에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해야만 했다. 전날 잠들기 전에 짐을 다 챙겨두긴 했지만, 두고 가는 물건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권이 잘 있는지 확인하던 중, 자그레브에서 국경을 넘어 오면서 도장을 하나만 찍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잠깐만. 출국 도장하고 입국 도장 하나씩이면 도장을 총 두 개 받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권을 살펴보니 슬로베니아 입국 도장 하나만 찍혀 있었다. 불안해졌다. 이거 괜찮은 건가, 원래 하나만 찍어주는 건가, 그때 같이 버스를 타고 온 다른 사람들도 도장 하나만 받았던 것 같은데, 적어도 밀입국은 아니네. 오만 가지 생각과 질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 나 때문에 엄마도 불안해 했다. 그 와중에 조식은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체크아웃을 하면서 게스트하우스 직원 분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괜찮은 거냐고 물어봤다. 그 분은 아주 쿨하게 "국경이 하나니까 도장은 하나만 받는 게 맞다"고 대답해줬다. 


류블랴나 버스정류장에서 어제 만났던 여자 분을 다시 만나게 되어 인사를 나눴다. 그곳에는 다른 한국인 부부도 함께 있었다. 세 사람은 가는 목적지가 우연히 같아서 함께 가기로 한 것 같았다. 엄마보다 나이가 조금 많으신 부부였는데, 매년 한 달 정도 자유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외국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아서 거의 매번 요리를 직접 하신다고. (이 분들에 대한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나중에 나에게 말하기를, 정말 부지런한 분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부부는 짧은 영어로도 당당하게 본인의 생각을 전할 줄 아는 분들이셨다. 엄마가 그 부부를 부러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왠지 모르게 들었다. 그때쯤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왔고, 아쉽게도 그 세 분과는 헤어졌다.


게스트하우스 직원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엄마는 괜찮겠다며 마음을 놓았지만 나는 국경을 넘을 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 했다. 온갖 상황을 상상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엄마는 아무 문제 없이 국경을 넘고서야 한숨 돌리는 나를 보면서 엄청 비웃었다.




다시 돌아온 자그레브 공항은 커다란 조개 껍질의 굴곡을 가진 천장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티켓팅 하기 전에 엄마와 둘이 서서 천장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 마치 우리가 조개 안에 갇혀서 위의 껍질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이트에서 1분 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한 후에 우리가 탈 비행기를 만날 수 있었다. 버스가 너무 금방 멈추자 엄마와 나 그리고 대부분의 승객이 웃었다. 하지만 우리가 탈 비행기를 본 순간, 모두들 실소가 터졌다. 



"아, 설마 저걸 타는 건 아니겠지."



모르는 분의 얼굴이 모자이크로는 잘 가려지지 않는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스티커를 사용했습니다.


"세상에나. 정말 이걸 타는 거야? 하늘에 뜨기는 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승객들은 크게 웃었고 동시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웅성댔다. 프로펠러로 나는 경비행기라니!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무서웠다.


좌석 지정을 미리 하지 않아서 엄마와 나는 앞뒤로 앉게 되었다. 내 옆에는 체격이 큰 남자 분이 앉으셨는데, 좌석에 앉자마자 주무셨다. 승무원이 안전 교육을 하기도 전이었다. 눈을 뜨고 있느니 차라리 나도 자야겠다 싶어서 눈을 꼭 감았지만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프로펠러가 만드는 소음은 굉장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옆자리 남자 분의 코 고는 소리도 굉장했다. 하지만 내가 잠 못 들었던 이유는 소음 만이 아니었다. 비행기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진동이 약간 느껴질 정도가 아니라 비행기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직선 비행보다 차라리 곡선 비행에 가까웠다. 경비행기니까 감수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지만, 놀이기구 탈 때와 같은 그 느낌이 계속 느껴지는 건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엄마에게 괜찮았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무서워하는 걸 보면서 '그래도 비행기인데 떨어지진 않겠지' 싶었다고 했다.



숙소로 가기 위해 공항에서 필레 게이트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엄마는 오히려 이 버스를 더 무서워했다. 기사님이 연세가 꽤 있어 보이셨기 때문에. 반면에 나는 비행기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을 한껏 즐겼다. 성벽 안으로 진입할 때, 함께 버스에 탄 일본인 분들이 "우와, 이건 세트가 아냐!"라고 연신 외치며 감탄했다. 충분히 그럴 만큼 멋있었다.


숙소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그전에 근처 슈퍼에서 저녁으로 먹을 것들을 간단하게 샀다.


숙소에 도착해서 호스트에게 전화해보니 길이 엇갈린 것 같았다. 호스트는 잠깐 일을 보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웃 분이 호스트 대신 숙소를 안내해주셨고 우리에게 열쇠를 준 뒤 유유히 사라지셨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가 우리 숙소인지 아니면 호스트의 응접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짐도 풀지 못 하고 20분 넘게 기다렸지만 호스트는 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있기가 지루해서 동네 마실을 다녀오기로 했다. 열쇠를 받은 덕분에 문은 잠그고 나갈 수 있었다.



해가 다 져서 동네가 어두웠다. 길에는 차가 많이 서 있었고 지나가는 여행자들도 많았다. 우리는 작은 카페를 하나 발견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기로 했다. 호스트는 왜 오지 않을까 쑥덕거리다가 내일은 어디어디를 가볼까 하고 계획을 짜기도 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카페에서 그렇게 30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도 호스트는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여기가 우리 숙소겠거니' 하고 짐을 다 풀어버렸다.



아주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호스트가 우리를 만나러 왔다. 백발의 할머니셨다. 드디어 호스트를 만나는 순간, 호스트는 우리 식탁을 보더니 저녁을 먹고 있었느냐며 미안하다고, 30분 후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사라지셨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이런 느긋함과 배려심이라니. 우리는 이 날에야 비로소 일종의 문화 충격을 경험했다.


1시간 후에 다시 만난 호스트는 매우 친절했다. 두 가지 지도를 보여주면서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표시해주셨고 전등 스위치 위치나 열쇠 사용법 등을 알려주셨다. 알고 보니 호스트는 우리 숙소 바로 옆집에 살고 계셨는데, 혹시 불편한 점이나 질문이 생기면 담을 넘어서 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본인도 담을 넘어서 가셨다. 다리 짧은 나도 손쉽게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담이었다. 친절하면서도 재미있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해서 한참을 웃었다. 엄마는 연세가 꽤 있으신 것 같은데 어쩜 저렇게 피부가 좋을까 하며 부러움이 섞인 질문을 되뇌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대문에는 잠금장치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지만 제 기능을 하지는 못 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굉장히 허술해 보였고 대문을 담 넘듯 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하는 나에게 호스트는 여기는 안전하니까 대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도 안전한 나라에 속한다고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문과 현관문에 커튼도 달려있는데다 어차피 호스트가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작은 불안감은 떨칠 수 없었는지, 현관문이 잠겨 있는 것을 두 번 정도 확인하고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로 돌아온 순간부터 첫날 샀던 유심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에서의 여행 방식에 익숙해진 우리는 여행 책을 가끔씩 들여다 볼 뿐, 검색은 하지 않았다. 책에 없는 내용은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스마트폰은 사진 찍는 도구 정도였다고나 할까.


이 날은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 했다. 국경을 넘고 비행기를 타느라 긴장해서 그랬는지 배고픔이 잘 느껴지지 않았기도 했고, 따로 시간을 내서 식사를 하기에도 애매한 날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힘들지 않았을까. 간식이라도 있었다면 엄마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 분명 어제도 비슷한 반성을 했었는데, 똑같은 실수를 또 저질렀다. 다 늦은 저녁에 식사하는 엄마를 보면서 내일은 꼭 간식을 사서 들고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행 4일 차, 무심한 딸에게 갈 길은 아직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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