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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 [엄마랑 크로아티아] - 엄마랑 크로아티아 : 자그레브



여행 2일 차

자그레브에서 류블랴나로 (1)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너는 기절한듯이 잘만 자더라, 빗소리 안 시끄러웠어?"


엄마는 빗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비가 내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버스터미널에 가서 류블랴나로 가는 버스표를 끊고, 그 건물 1층에서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샀다. 숙소로 돌아왔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느긋한 아침은 아니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를 탔다. 엄마는 버스를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국경에서 여권 검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엄마는 쭉 잠만 잤다. 나는 가져간 여행 책을 다시 보면서 오늘의 일정을 대략적으로 계산하며 시간을 보냈다.


류블랴나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SIM CARD를 구매했지만, 둘 다 전화는커녕 데이터도 사용할 수 없었다. 왜 먹통인지 원인을 알 수 없었고, 인포메이션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분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통신사를 찾아다니는 건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고,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의 주소를 보여주며 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 친절했던 인포메이션 직원 분께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고 마음은 급했다. 우산이 캐리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비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이틀 간 스마트폰 없이 책에만 의지해서 여행해야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류블랴나의 숙소도 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으로 예약했기 때문에 아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고생을 각오했던 건지, 엄마는 굉장히 기뻐했다. 그런데 하필 우리가 묵을 방의 수도가 고장나서 체크인 시간이 두 시간 늦춰졌다. 방을 바꿀 수도 있었지만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알았다고 하고 우산을 빌려 나왔다.



비가 내리는 도시는 그 나름의 멋이 있다. 빗방울과 구름 때문에 구시가지는 음울했다. 그리고 더욱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엄마는 도시가 너무 예쁘다, 날이 맑았더라면 더 좋았겠다며 즐거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워했다. 프레셰르노브 광장에서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다.



'규이지나'였던가, 엄마가 스튜를 먹고 싶어 해서 찾아간 곳이었다. 메뉴판에 사진이 많지 않아서 메뉴 밑에 적힌 재료들을 보고 완성된 요리를 추측해야 했다. 스튜는 따뜻했고 고기가 부드러웠으며 조금 짰다. 엄마와 나는 스튜보다 같이 주문한 샐러드 맛이 더욱 맘에 들었다.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었다. 우리 둘은 이 닭고기는 어떤 양념을 했을까, 이 고소한 검은 씨앗은 도대체 뭘까, 샐러드 소스는 무엇일까, 한참을 추리했다.


식당 안은 따뜻했고 음식이 맛있었다. 우리는 여행 후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 나는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자식이 아니다. 여행 전에도 그랬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조금 솔직했던 것 같다.


만족스러웠던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여기저기 구경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정말 화려했다. 엄마도 나도 성당에 가본 적이 없었다. 성당은 대개 이런가 싶었다.


중앙 청과물 시장에 가는 도중, '크라셰브카'라는 특산물 전문점에 들렀다. 여기서 호박씨 오일을 판다는 내용을 본 엄마가 여기는 꼭 들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주인 어르신으로 추정되는 분이 우리가 시식해볼 수 있도록 오일 두 가지를 조금 따라주셨다. 준비되어 있는 빵을 한 조각 찍어 먹은 그 순간, 우리는 거의 동시에 "이거야!"라고 외쳤다. 아까 먹었던 샐러드 소스가 바로 호박씨 오일이었던 것! 호박씨가 이렇게 고소한 맛인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는 샐러드에 들어 있던 그 검은 씨앗은 볶은 호박씨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두 가지 오일 중에 우리가 반한 맛의 오일은 전통 방식으로 짜내는, 좀 더 비싸고 좋은 상품이었다. 하지만 값이 대수인가. 250ml를 사러 갔던 것이지만 나는 망설임없이 500ml를 골랐다. 아쉽게도 그게 제일 큰 사이즈였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시장에는 노점이 많이 열려 있었다. 신기한 모양의 채소들도 많았다. 기형인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모양들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과일을 파는 노점이 많았고 대부분 비슷한 품목들을 팔았다. 우리는 여기저기 둘러본 뒤 한 곳에서 블루베리와 라즈베리를 샀다.



시장 바로 근처에서 요거트 자판기를 발견했다. 자판기의 천국이라는 일본에 갔을 때도 이런 건 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엄마가 요거트를 좋아해서 작은 사이즈의 기본 요거트를 하나 뽑아 갔다.


숙소로 돌아가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사온 음식들을 대충 정리해놓고 다시 나왔다. 게스트하우스라 방 안에 냉장고가 없는 게 좀 아쉬웠지만, 엄마는 요거트를 상온에 놓아도 될 만큼 날이 쌀쌀해서 괜찮다고 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 만큼은 아니었지만 프란체스코회 교회 내부도 충분히 화려했다. 교회라고는 하지만 가톨릭과 뒤섞인 장소였다. 처음 들어갔을 때 나도 모르게 "여기 교회 맞아?"라고 엄마에게 소근거렸다. 



구시가 거의 끝 쪽까지 걸어가자 또 다른 교회가 보였다. 그런데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아무래도 관광지보다는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 쪽과 가까워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여행 책을 보니 지도에 성 야고보 교회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 안에 들어갔을 때는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관광지가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예배를 드리는 역할 만을 하는 곳 같았다. 그냥 나가자고 하던 순간, 안쪽에서 목사님으로 추정되는 분이 나오셨다. 그리고 엄마에게 교회 내부를 손짓하며 무어라 설명하셨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때 엄마는 알아 듣는 척하며 그저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난 후에 그분은 우리에게 편하게 있다 가라며 불을 전부 켜주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셨다. 화려한 성당과 교회를 먼저 보고 와서 그런지, 이곳은 오히려 수수하게 느껴졌다. 파이프 오르간과 의자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전부 낡아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 도시에는 곳곳에 조각상들이 많다. 걸어다니며 조각상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골목 배수로에 있던, 물에 쓸려 가는 얼굴의 형상들은 기괴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한참을 구경했다.



여기저기 상점들도 구경하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왔다. 우리는 저녁을 먹을 만한 마음에 드는 식당을 발견하지 못했고, 게스트하우스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했다. 야채 스프 비슷한 걸 주문하려고 했는데 직원이 버섯 스프를 추천해서 버섯 스프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여기도 샐러드가 정말 맛있었다. 듬뿍 올려진 치즈에 신선한 채소와 토마토, 그리고 올리브까지. 다만 버섯 스프는 조금 많이 짰다. 빵을 찍어 먹어도 짰으니, 말 다 했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낮에 산 블루베리와 요거트를 먹었다. 블루베리를 잘 씻어서 요거트에 넣어 먹으니 꿀맛이었다. 요거트도 신맛이 강하지 않아서 술술 넘어갔다. 라즈베리는 아까웠지만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하얗고 작은 벌레들이 라즈베리에 붙어 꿈틀거려서... 살 때부터 있던 건지 아니면 상온에 놔 두는 동안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블루베리와 요거트는 정말 맛있었다.


사실 이 날, 엄마는 오후에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는데 내가 괜찮은 카페를 찾을 때까지 미루다가 결국 마시지 못했다. 그게 마음에 걸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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