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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 [엄마랑 크로아티아] - 엄마랑 크로아티아 4일 차 : 두브로브니크 (1)



여행 5일 차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올드 타운)에서



여행 시작 이후 처음으로 맑은 하늘과 쨍쨍한 햇볕을 만날 수 있었다. 성벽 투어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날씨를 확인한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젯밤에 남은 재료들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우리는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어제까지 내가 쓰고 다니던 모자는 엄마에게 양보했다. 엄마도 선글라스가 있긴 했지만 모자를 쓰는 것과 안 쓰는 것은 차이가 크다.


버스는 거의 만원이었다. 구시가로 가는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서 가야 했지만 날씨도 맑고 버스 기사 분도 친절해서 엄마도 나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혹시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칠까봐 구글맵 GPS를 켜놨지만 그건 기우였다. 필레 게이트에 도착하자 기사님은 큰 소리로 필레 게이트라고 알려주셨고 버스에 탔던 거의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내렸다. 아마 관광객이 많이 탔기 때문에 알려주셨던 것 같다. 필레 게이트 앞에는 이미 엄청난 숫자의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근처 슈퍼에서 생수와 초콜릿바를 샀다. 성벽 투어를 하다가 힘들거나 도중에 허기가 지면 엄마에게 줄 생각이었다.



역광 사진이어서 밝기와 채도를 수정했습니다.


성벽 내로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곧장 군둘리치 시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시장은 아직 활기찬 분위기였다. 라벤더 관련 제품이 제일 많이 눈에 띄었고, 조금 안쪽으로 가면 비누나 말린 과일, 고풍스러운 표지의 노트 등등 다양한 것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카모마일을 재료로 만든 수제 비누 하나와 말린 과일 믹스 한 봉지를 샀다. 말린 과일은 엄마의 간식이었다.


그리고 나서 성벽 내의 거리를 구경했다. 아까 지나친 플라차 거리도 다시 걷고, 루자 광장의 버스킹도 구경하고. 사실, 구시가는 보이는 모든 것이 유적이고 관광 명소였다. 나는 줄곧 여행 책에 적힌 설명을 읽으며 엄마의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뭐, 엄마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눈으로 담을 것도 넘쳐났으니까. 특히 플라차 거리 자체가 좋았다. 반질반질한 석회암으로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길은 걷기에 불편하지 않았고 보기에도 예뻤다. 엄마는 그 길을 걸으면서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다.


날씨가 더 더워지기 전에 성벽 투어를 하러 갔다. 여행 책에 적혀 있는 입장료보다 실제 가격이 조금 더 비쌌다.



성벽 위에서 바라본 장면은 장관이었다. 엄마와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도 연신 "눈으로 보는 것만 못 하네."라고 말했다.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햇볕이 쨍쨍했지만 성벽 위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절반 정도 왔을 때, 잠시 앉아 쉬었다. 아까 시장에서 산 말린 과일을 꺼내서 나눠 먹었다. 그 맛은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달달했다. 물론 말린 과일 겉에는 설탕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설탕 맛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오렌지로 추정되는 과일은 새콤했고 무화과는 고소하면서도 과일 자체에서 은은한 단맛이 났다. 엄마는 무화과가 더 맛있다며 봉지 안쪽에 숨어 있는 무화과를 찾아 먹었다. 다른 사람이 우리 곁에 앉자, 엄마는 그 사람에게 말린 과일을 권했다. 그 사람은 거절했지만, 너무 힘들어 보여서 나도 왠지 나눠주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힘을 내서 걷기 시작했다.



보수 작업을 진행 중인 것 같은 건물도 간혹 보였다. 허물고 새로 짓기 보다 복원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구시가 안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을까? 여기는 너무 좁아서 창문을 통해 방 안이 다 보이잖아. 싫을 거 같아."

"그렇겠지."


관광 도시의 주민은 사생활을 침범당하는 경우가 많을 거라며 엄마와 얘기를 나눴다.


성벽 투어를 마치고, 부자 카페에 가기로 했다. 긴가민가 하며 들어간 곳에서 그 카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몬 맥주를 주문했지만 직원 분은 그 제품이 없다고 했다. 그럼 뭐가 있냐고 물으니 라임 맥주를 추천했다. (그게 맥주였는지 아니면 다른 음료 종류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톡 쏘는 맛이었고 알코올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추천받은 것을 두 병 주문했다. 그런데 그 카페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소리 때문에 그다지 여유를 느끼지 못 했다. 게다가 카페 앞쪽 그러니까 바다 쪽 바위에서는 사람들이 다이빙을 하면서 드문드문 환호를 내질렀다. 엄마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성벽 투어 끝자락에도 카페가 있었는데, 차라리 돈을 더 주고서라도 거기서 음료를 마시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 여행 책에 나온 음식점인 '타지 마할'을 찾아 갔다. 좁은 골목 안쪽에 있어서 찾기 어려웠는데 길에서 호객하던 다른 상점의 직원 분이 도와주셨다. '체바피'라는 양고기 요리와 치즈 세트 그리고 과일 음료 두 병을 주문했다. 체바피는 고기가 굉장히 짰지만 겉의 빵과 함께 먹으면 짠맛이 어느 정도 상쇄되어서 그럭저럭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치즈 세트는... 4분의 1도 먹지 못 했다. 치즈의 꼬리한 향이 너무 힘들었다. 와인과 함께 먹어야 할 메뉴가 아니었을까. 치즈를 많이 남긴 것을 본 직원 분은 나에게 맛있었냐며 물었다. 별로였다고 하기 뭣해서 그냥 맛있었다고 답하고 웃었다. 남긴 치즈가 한 가득이었는데. 음식을 남기고 나면 죄책감이 든다. 요리사에게 혹은 지구에게.



구시가에는 고양이들이 많았다. 이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도 고양이가 있었다. 테이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애교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에도 와서는 '나도 하나만 줘봐.' 하듯이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서 뭘 나눠주진 않았다.



짠 음식을 몇 번 먹어보고 나서야 요리를 해 먹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세 끼는 무리더라도 아침 정도는 만들어 먹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렀다. 나름 큰 마트여서 과자, 기본 양념, 야채, 고기, 유제품 등을 비롯해서 생활용품들도 다양하게 있었다. 덕분에 소금과 후추 그리고 샤워볼도 살 수 있었다. 신기했던 건, 크로아티아든 슬로베니아든 어느 슈퍼에서라도 치즈와 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 


이곳에도 고양이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고양이를 주시하자 직원이 고양이를 휘휘 쫓아내 버렸다.



숙소 냉장고를 채우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빨래를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빨리 마를 것 같았다. 그런데 세탁기가 아주 오래전 모델인데다가 한 번도 사용해 본적 없는 제품이었다. 게다가 영어도 아니고 크로아티아어로 적혀 있어서 도통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번역기의 힘을 빌려 버튼에 적힌 모든 글자를 해석한 뒤, 세제 대신 샴푸를 넣고 대충 짐작해서 세탁기를 돌렸다. 세탁기 앞에서 한참을 씨름하고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그저 탈수만 잘 되기를 바랐다.



내가 세탁기와 씨름할 동안 엄마는 커피를 준비했다. 냄비로 커피를 끓이다 넘치는 바람에 가스레인지 청소를 해야 했다. 가루를 넣어서 끓이는 방식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끓인 물에 가루를 타 먹는 방식이었다. 커피 맛은 나쁘지 않았다. 말린 과일 그리고 과자를 곁들여 먹으며 오후의 티타임을 즐겼다. 커피와 과자는 식재료를 사면서 같이 사왔다. 과자는 짭쪼름한 치즈 시즈닝이 붙어 있어서 자꾸 손이 갔다. 엄마도 과자의 맛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열어놓은 현관문을 통해 옆집 사람들이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래를 널면서 보니 옆집에서도 티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해질녘에 산책을 나갔다. 구시가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호스트가 알려준 다른 슈퍼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 슈퍼는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 사이에 숨어 있었다. 낮에 가본 곳과는 다르게 내부가 넓지 않았고 품목도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우리는 맥주 두 캔과 과일 하나를 골라서 계산했다.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제 마감 시간이라며 직원 분이 서둘렀다. 


돌아오는 길에 빵집 하나를 발견했다. 메뉴만 구경할 셈으로 들어갔다가 야식으로 먹을 빵을 하나 사서 나왔다. 이미 해가 다 져서 주위가 어두웠다.


"저 야경 보려고 전망대에 올라가는 거겠지?"

"우리는 여기서 보네."


피곤해서 스르지 산 전망대에 갈 계획은 취소했었는데, 산책 나온 덕분에 좋은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늦은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엄마는 TV를 보면서 족욕을 했고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같이 TV를 보다 어느샌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래저래 어제보다는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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